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헬름 카나리스 (문단 편집) === 영국과의 접촉, 그리고 의심 === 전쟁 발발 후, 카나리스는 전선을 방문하여 SS가 벌이는 여러 전쟁 범죄행위를 목도하였다. 또한 아프베어가 수집한 여러 잔혹행위도 보고받았다. 이런 것에 충격을 받은 카나리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반 히틀러 운동에 가담하였다. 1940년 1월 카나리스는 해군 대장으로 진급했고 히틀러에 반대하는 독일 장교들의 비밀 모임인 [[슈바르체 카펠레|검은 오케스트라]](Schwarze Kapelle)를 비밀리에 이끌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아프베어는 MI6와 접촉하여 영국이 수집한 소련군 정보를 입수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카나리스와 MI6와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1942년부터 카나리스는 직접 에스파냐를 정보 수집의 명목하에 자주 방문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의 정보원과 자주 접촉하였다.[* 일부 정보원들은 [[비시 정부]] 치하의 프랑스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카나리스는 이들을 통해 독일 군부가 히틀러를 제거한 후 영국과 협상할 의향을 수 차례 타전했으나, [[윈스턴 처칠|처칠]]의 무조건 항복 요구로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SD가 붙잡은 영국 측 요원을 아프베어의 "이중간첩"이라는 핑계로 빼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하이드리히의 의심이 깊어졌고 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도 영국과의 접촉을 멈추지 않았다. 1942년 6월 하이드리히가 체코에서 암살되면서 아프베어의 통폐합 시도는 잠시 중단되었으며 SD와 공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당시 독일의 대표적인 반나치인사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당시 나치는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합한 국가교회(Reichs kirche)를 만들고, 나치에 충성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국가교회는 "히틀러는 메시아다"라는 신앙고백을 강요했는데 이에 반발한 개신교인들이 조직한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는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이고 본회퍼는 이 고백교회의 신학교 교수이자 지도자급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당연히 나치는 그를 감시하고 방해했다.]가 아프베어에서 근무했다. 당시 독일 남자는 누구나 군에서 복무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는 목회자도 예외가 없었다. 나치에 미움을 사고 있던 본회퍼는 최전방으로 배치될 수도 있었는데 그와 친분이 있던 카나리스는 본회퍼가 아프베어에 속하도록 서류를 만들고 정보수집을 명목으로 영국과 미국의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다. 단, 정기적인 보고서를 제출하는 조건이었다.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성공하면, 발키리 작전이 발동되고, 본회퍼가 영국 등에 선을 넣어 강화협상을 준비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활약은 카나리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